설교요약

자녀들과 아비들에게 (엡6:1-4)

220508 주일낮예배 (어버이주일)

어버이날이 무색하게 부모와 자녀 간에 갈등이 있는 가정들이 적지 않습니다. 재산이나 재정 문제로, 고부간과 부부 간의 갈등 문제로 부모와 자녀 간에 왕래를 힘들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합니까?

첫째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엡6:1).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의 통치 아래서”란 뜻입니다. 세상도 부모 공경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부모가 자녀를 낳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효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것을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십계명 제 5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생명이 길게 된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 되고 장수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첫 계명입니다. 십계명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5-10계명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부모 공경은 이웃 사랑 계명 중에서 가장 먼저 있는 계명입니다. 결국 이웃 사랑은 부모 공경에서 시작합니다. 만약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아직 이웃 사랑을 시작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넷째로, 부모는 이 땅의 모든 권위를 대표합니다. 십계명 제 5계명에서 부모라는 대상을 특정했다는 것은 부모가 갖는 대표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가장 먼저 만나는 대통령, 목사, 교사입니다. 이 땅의 권위자들을 부모를 통해서 먼저 만납니다. 그리고 부모를 통해서 어려서부터 권위자의 존재를 알고, 권위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끝으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특히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엡6:4). 그리고 감정이 아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여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쉽지 않지만, 복음이 부모로 하여금 자녀를 양육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께 순종하셨듯이,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인내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듯이, 아비는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와 상급 (시127:1-5)

220501 주일낮예배 (어린이주일)

요즘 어린이날이 무색하고 어린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만큼 출산률이 저조하다는 뜻입니다. 저출산의 원인을 놓고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문제다, 출산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이 잘못됐다, 또는 국가 정책이 잘못됐다 등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젊은 세대들이 자녀가 부담이 되고 짐이 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자식에 대해 어떻게 말씀할까요? 시편 127편 3절은 말씀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즉, 자식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또한 이런 자식을 젊을 때 낳고, 이런 자녀가 많은 자는 복되다 말씀합니다(시127:4,5).

오늘날 어떤 이들은 먼저 집을 세우고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가정이 안정돼야 자녀도 낳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그런데, 시편 127: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그리고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우리는 환경이 좋아지면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집을 세우시고 지켜주시지 않으면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만이 창조주요, 구원자요,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면 집이 세워지고 가정도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수고의 열매도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자식은 짐이 아니라, 여호와의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자녀의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식구가 하나 더 늘면, 하나님께서 그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먼저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의 복을 누리길 바랍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19-23)

220501 주일낮예배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두려움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은 반드시 대상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은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람일 수 있고,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어떤 질병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여러 군데에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하고 명령하십니다.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만약 두려워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죽을까봐, 다칠까봐, 사람들에게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집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요20:19). 두려움이 이들의 행동을 제한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려움의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왜 두려움을 갖게 되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에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3:10). 이런 아담의 행동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단절이 생긴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그 분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실제로 어떤 아이들은 분리불안장애를 갖습니다. 부모와 떨어지면 두려워하여 웁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늘 두려워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여겨 주시고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 안에서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평강의 왕으로 오셨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말씀으로 “평강이 있을지어다”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자는 평안을 얻습니다. 그리고 평안의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부활신앙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요20:1-18)

220417 주일낮예배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기독신자들이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고전15:17,1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말했습니다(요20:3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고 만지기도 했습니다(요일1:1).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 것과,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요20:8, 16).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눅16:31).

그런데,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단지 머리로만 알면 안 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까? 주님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주님이 안 계신 것을 알고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 무덤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은혜로 말씀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220410 주일낮예배 / 마21:1-11

기독신자는 해가 거듭할수록 그의 믿음은 더 분명해지고 확실해 질 수 있습니다. 매년 고난주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보내면서 우리의 십자가 부활 믿음은 더 깊어지고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신자는 그렇게 되기 위해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신자가 믿어야 하는 예수님은 누구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내게로 끌고 와라“(2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즉시 순종하였고, 나귀의 임자 역시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나귀를 보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믿는 자의 주님이십니다. 믿는 자는 예수의 종입니다. 결정권자는 종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둘째,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이것이 선지자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은 그냥 왕이 아니라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지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잃은 양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주의 제자들도 겸손히 남은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26:26, 28). 따라서 예수를 왕으로 믿는 신자는 예수님처럼 겸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외쳤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찬양하며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신자는 예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면 힘들고 불평하게 되지만, 예수님이 하시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열매들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맺어지길 소원합니다.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 

220403 주일낮예배 / 요3:1-15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경계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은 믿음 없이 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익숙하고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무슨 말씀입니까? 니고데모가 아무리 유대인의 지도자란 타이틀을 갖고 있어도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나지 못했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즘 같은 상황으로 말하면, 몇 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기독교계에서 지도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했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다시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갓난아기가 스스로 잉태되고 스스로 태어날 수 없듯이, 오직 영혼의 거듭남은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때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거듭나게 하십니다(벧전1:23).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까? 거듭남의 증거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요일5:4). 니고데모는 결국 거듭나서 나중에 예수님을 변호했고(요7:51),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는 용기 있는 행동도 했습니다(요19:39,40). 둘째는 회개입니다. 거듭난 자는 그 심령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회개합니다(시51:1). 셋째는 사랑입니다(요일4:7; 5: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특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넷째는 진실한 기도입니다. 거듭난 영혼은 영적으로 호흡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이유

220327 주일낮예배 / 창2:4-17

사람이라는 존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특별한 존재라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특별한 존재라 하여도 인간은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04편 29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영혼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습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이유와 연결이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에덴은 단순히 동산이 아닙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그곳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에덴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이란 성소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지으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은 모세 때 제정된 것이 아닙니다. 후대 기독교인들이 합의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공적으로 예배하는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기독교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공적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하듯 하면(골3:17,23) 그것이 곧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롬12:1). 공적예배와 삶의 예배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습니다. 공적예배 없이 삶의 예배만 있지 않고, 삶의 예배 없이 공적예배만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예배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핵심은 사람

220320 주일낮예배 / 창1:24-2:3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해서 사람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창조가 창조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장 늦게 지어졌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창조물 중에 가장 늦게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창조의 절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까지 다 지으신 후에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이게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둘째,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혼이 있는 존재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헌법이 인간의 기본권을 강조하고 인권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마16:26).

셋째, 오직 사람에게만 통치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제왕적으로 폭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정원사처럼, 사람이 이 땅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땅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넷째, 하나님은 사람을 돌봐주십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잘 자라도록 먹을거리까지 먹이십니다(창1:30). 이렇게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과 생물도 먹이신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얼마나 더 먹이시고 돌봐주시겠습니까(마6:26).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특별하게 창조하신 사람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영혼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고 순종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진리 전쟁

220313 주일낮예배 / 롬1:18-32

세상은 자꾸 반성경적인 법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정치 문제가 아니라 진리 문제입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은 진리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가 중심되어 세상은 진리를 막고 부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롬1:18).

본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의 창조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지게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인 인권입니다. 무신론자 과학자들도 인권을 말하려면 종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진리를 애써 부인합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애써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바벨탑을 지을 때처럼,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도록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8절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의 우상으로 바꾸는 행위를 합니다(롬1:21, 23).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바꿉니까? 진화론 등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여러 신들 중에 하나라고 하면서 종교통합을 하게 합니다. 기독교를 단지 관념의 종교로 격하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성경이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 “사람이 편집하고 꾸며낸 이야기다”라는 식으로 성경의 권위를 무너트립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닌, 눈에 보이는 사람, 물질, 돈 등을 의지하고 숭배하며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닌 나를 위한 액세서리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거짓으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진노를 내리십니다. 그 진노는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가 변화되어 진리를 수호하는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 전쟁에서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위정자는 하나님의 사역자

220306 주일낮예배 / 롬13:1-10

우리는 대통령으로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의 질문에 앞서, “국가 위정자는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답을 알면, 국가 위정자가 해야할 일이 나옵니다. 그리고 국가 위정자를 누가 세우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중요합니다. 

먼저, 국가 위정자가 필요한 이유는,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격려하고, 악인들을 제재하고 처벌하기 위해 존재합니다(롬13:4, 벧전2:13,14). 따라서 만약 정부가 없고 위정자가 없다면, 국민의 생명과 자유와 안전과 사유재산 등에 대한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국가를 세우시고 위정자를 세우십니다. 

국가 위정자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롬13:1). 옛말에도 대통령은 하늘에서 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성경도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말씀합니다. 그래서 위정자는 “하나님의 사역자”(롬13:14)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국가 위정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위정자가 하나님의 사역자라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국가 위정자에게 크게 두 가지 덕목이 요구됩니다.

첫째, 국가 위정자는 정의로운 자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위정자가 공의롭게 나라를 잘 다스릴 때, 나라는 공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위정자가 국민에게 뇌물을 받아 눈이 멀게 된다면 나라는 쉽게 부패할 것입니다(잠29:4, 잠17:23). 따라서 위정자는 나라를 정의롭게 잘 다스리기 위해 헌법정신을 갖고, 법치를 해야 합니다. 

둘째, 국가 위정자는 국민을 사랑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위정자가 국민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그가 법을 어떻게 다루고 실천하는 지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정자가 국민을 사랑하면, 역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정정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실정법도,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 공의롭고 국민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역자로 잘 쓰임받길 기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220227 주일낮예배 / 시23:1-6

시편 23편은 교회를 다녀본 분들이라면 많이 알고 또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의 성경 말씀을 좋아하는 것과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한다면,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나를 구원하고, 나를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게 만들며, 그 믿음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줍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은 실제로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양이 어떤 존재인지, 또한 양에게 목자는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스스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은, 단순히 머리의 지식으로가 아닌, 실제 체험을 통해 나온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는 어떤 목자입니까? 

첫째, 여호와는 양을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양을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즉 양이 배불리 먹고 쉴 수 있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육적인 양식과 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성도의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먹이시고 말씀 안에서 안식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주님의 양이라면, 성도는 반드시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즉, 성경을 주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지킬 수 있고, 영혼이 자라며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여호와는 늘 양과 함께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본뜻은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즉, 사망이 아닌, 사망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칼이 날카롭고 사자가 달려들어도, 그것이 그림자라면 사람을 해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무수히 많은 사망의 그림자로 우리를 위협하지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자는 사망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양인 성도의 특권이고,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220220 주일낮예배 / 마6:24-34

염려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으로서 죄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선, 염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프로메림나오”입니다. 이것은 미리라는 뜻인 “프로”와 염려라는 뜻인 “메림나오”의 합성어입니다. 즉, 염려는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불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곧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염려는 우상을 만들게 합니다. 물질, 인맥, 명예 등이 앞으로 나의 앞날을 안전하게 보장해줄 것이라 믿고 그것을 어떻게든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염려는 우상숭배를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일에서 벗어나도록 몇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임을 믿으라 하십니다. 공중의 나는 새가 어떻게 생존하며 살고 있는지, 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지 보라 하십니다. 이들 스스로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또한 길쌈도 수고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라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들을 기르시고 자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공급자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오늘 필요한 것을 오늘 채워주시고 내일 필요한 것을 내일 채워주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임을 믿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생명의 연한을 늘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태어날 날과 죽을 날을 정하시고 주관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고, 약이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음식과 약도 소화되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앞날은 오직 주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염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라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해주실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220213 주일낮예배 / 마25:31-46

세상의 시작이 있다면, 세상의 끝도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히11:3). 그런데 세상의 끝 날이 언제인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반면에,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심판대 앞에 세우기 위해 산자와 죽은 자 모두를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대 앞에서 양과 염소가 구분이 될 것입니다. 양은 참 신자이고, 염소는 거짓 신자입니다. 양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은 자들이란 말을 듣고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 땅에서 신자 행세하며 살았던 자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염소 또는 가라지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따라서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오직 믿음만 갖고 천국에 가니까,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까? 이런 질문은 오직 ‘구원’에만 초점을 둔 질문입니다. 만약 구원만이 신자의 목적이 되면, 마치 부모에게 이미 재산을 상속받았으니, 부모를 공경하지도 않고,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만 살아도 된다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는가”에 대한 질문에 앞서,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게 하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따라서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신자는 아무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며 선행하며 살아갑니다. 참된 신자로서 양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마태복음 25장 35,36절이 증명해 줍니다. 반면에, 염소들은 믿음의 신자가 아니었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지 않았습니다(마25:42,43). 결국 우리의 열매로 우리의 믿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기독교에만 참된 구원이 있습니다.

220206 주일낮예배 / 롬4:1-8,17-25절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종교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행위로 신을 만족시켜서 심판을 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 종교의 특징은 자력으로 인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고행하거나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죄인이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 선행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결코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죄인은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찬송가 257장의 가사처럼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세상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롬4:7,8).  

그렇다면, 죄인을 구원하게 하는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입니까? 로마서 4장 17절에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천국 백성으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믿은 대로 하나님은 없던 이삭을 있게 하셨고, 먼 훗날 십자가 달려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십니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 창시자도 자신이 구원자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 약속하셨습니다(요11:25,2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셨습니다(요14:6). 기독교에만 참된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220130 주일낮예배 /  눅16:19-31

사람은 살면서 노후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후준비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후준비입니다. 우리 인생은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는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에 우리가 어디서 영원히 보낼 것인지는 더 중요합니다. 

성경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이생에서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부잣집에서 나오는 음식쓰레기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각각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거지는 영원한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지만, 부자는 뜨거운 불이 있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지는 천국에 갔을까요? 단지 부자가 돈이 많은 것 때문에 지옥에 갔다면, 이 땅의 모든 부자는 지옥에 가는 것일까요? 반면에 돈 없는 거지는 다 천국에 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는 조건은 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는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반면에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면, 그 돈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만 천국에 가지 않고, 이 땅에서 천국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자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며 가난한 자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다른 이웃에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가 예수를 믿으면, 자신의 환경 때문에 쉽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고난 중에도 천국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고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이 땅에서 천국백성답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

220123 주일낮예배 / 고후5:17-21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새 것으로 지음 받아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한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영혼이 구원박지 전에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고 그래서 단절된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영혼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바라십니다(고후5:21). 그래서 우리와 깊이 교제하길 바라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와 화목하게 하는 일을 혼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직분을 세우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5:18,19)을 주셨습니다. 교회에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와 같은 직분자를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가 서로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성도와 성도가 서로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다(잠16:7).

따라서 직분자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로서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직분자가 있는 곳에 불협화음이 하모니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직분자를 통해서 각 기관과 구역과 교회 전체가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직분자가 자기를 부인하여 겸손히 하나님과 다른 지체를 섬길 때, 상대방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하나님과 다른 지체와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듯이, 우리도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이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병원입니다

(220116 주일낮예배 / 마9:9-13)

교회는 그 자체로 성도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교제)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성도의 교제모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모인 모임입니까? 바로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사실 병든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또한 병든 자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본문(마9:9-13)에서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집에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도 함께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먹이십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이들과 함께 교제 하십니다. 그것이 예배이고, 성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늘 죄인들과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부르셨고,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병든 죄인들을 사랑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나와 치료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 하셨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도 구원과 치료가 필요한 죄인이고 병자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하며 죄인과 세리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예수님도 정죄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계3:17). 분명 이들도 중증 환자들인데, 자신의 병과 죄를 보지 못해서 치료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연약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구원을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시51:17). 주님의 병원인 교회 나와 함께 공적으로 예배할 때 성도는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영적 백신주사를 맞고 영혼이 구원받고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고 치료하는 일에, 교회를 사용하시고, 직분자를 사용하십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220109 주일낮예배 / 행2:41-47)

우리는 보통 대형교회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대형교회가 안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반대로 무조건 작은 교회라고 좋은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가 본질을 붙들고 있는가, 본질을 향해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 넘었음에도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날마다 구원받은 사람들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힘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강림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은 다 세례를 받고 교회로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성도가 함께 모여 하는 공적예배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수직적인 교제입니다. 반면에,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도 간의 수평적인 교제입니다. 성도에게는 이러한 두 교제가 균형 있게 필요합니다. 어떤 신도는 주일에 예배만 참석합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제가 없다면, 성도는 다른 성도의 뒤통수만 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체의 필요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만 중시하면 성도는 쉽게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성도의 교제만 한다면, 성도는 믿음생활이 아니라, 사교행위만 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성도가 공적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를 다른 지체들에게 나눠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 사랑을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섬김이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교회가 함께 기도하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힘 있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대형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하며 서로 섬기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산성교회와 각 구역이 모이기를 힘쓰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신앙을 전수하는 교회

(220102 주일낮예배 / 삿2:6-10, 시78:5-8)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사후에 백성들은 다른 세대가 되어 여호와를 알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여호와를 예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를 특징짓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 위대한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 신앙이 다른 세대가 세웠는가?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전수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저절로 자녀가 하나님 잘 믿는 자녀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믿는 지금의 세대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후손에게 잘 물려주어야 합니다. 시편78 5-8절이 이를 말씀합니다. 후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서 후손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잊지 않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하려면 신앙이 전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을 전수하려면 혼자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의 몸된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통해서 신앙은 다음 세대에 전수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온 가족이 주일을 성수하여 공적으로 함께 예배할 때 신앙은 전수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준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일성수 신앙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공적예배와 함께 가정예배를 통해서 신앙을 전수할 수 있습니다. 가정예배하면 거창해 보이는데,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만 해도 가정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식사 전에 가장이 가족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 가장의 영적 권위는 세워집니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고, 가정과 교회를 지켜 주신다는 신앙이 자녀들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새해 주일성수하여 공적예배하고 가정예배를 통해 신앙을 전수하는 일에 힘쓰는 산성교회의 모든 성도되시길 바랍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

(211226 주일낮예배 / 약4:13-17)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계획된 대로 되지 않습니다.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약4:13,1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경험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한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가 2020년 초에 코로나 펜데믹이 올 줄 알았겠습니까? 일본의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많은 행사들이 연기되거나 최소가 되었고,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누가 망하기로 작정하고 사업을 하려 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더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안개와 같은 인생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약4:14). 안개의 특징은 갑자기 생겼다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금방 있다고 없어지는 안개의 모습이 마치 인간과 같다는 것입니다. 병이 든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사고로 이 땅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이 안개와 같아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사화복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5절은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 말씀합니다. 이 땅을 떠나고 싶어도 하나님이 붙들면, 살아야 하고, 살고 싶어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가야 합니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되고, 준비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겸손히 주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약4:16 참고). 허탄한 자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그 분을 높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약4:17 참고). 안개와 같은 짧은 인생인데, 생명이 주어졌다면,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선을 베풀며 살 수 있습니다. 물질, 재능,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웃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 가운데, 단 하루를 살아도 주와 이웃을 위해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신앙생활

(211212 주일낮예배 / 엡4:25-32)

세례를 받는 교인은 세례교인의 의무와 권리를 행하면서, 보다 책임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는 사람 혼자의 힘으로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먼저 교회에 입교한 기존 신자들이 신앙의 본을 보이며, 이제 막 세례 받은 신자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섬기고, 돌봐줄 때, 그의 신앙은 잘 자랄 수 있습니다. 또한 새로 입교한 신자도 성경말씀을 잘 배우고 그 말씀대로 행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신앙생활의 몇 가지 지침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성도 여러분. 서로가 참된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25).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주의 몸 된 교회에 붙은 가지가 되어 서로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지체된 서로에게 거짓이 아닌 참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거짓말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 갈라놓았습니다. 그 만큼 거짓말은 무섭습니다. 따라서, 만약 거짓이 교회 안에 난무한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참된 말을 하면, 거짓은 떠나가며 교회는 건강하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성도 여러분. 서로 선한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29). 선한 말의 반대말은 나쁜 말입니다. 그리고 나쁜 말은 곧 독이 가득한 더러운 말입니다(31). 그리고 더러운 말은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들입니다(31). 이런 말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약1:20), 자신과 상대방의 영혼을 더럽히는 말들입니다(마15:18). 그리고 이런 악독한 말을 하고 분을 오래도록 품으면, 죄를 지어 마귀에게 틈을 줍니다(26).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30). 하지만, 성도가 서로 선한 말을 하면 성령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마귀는 떠나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성도 여러분. 서로 선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28). 사람이 게으르거나 욕심이 과하면 도둑질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일 때 남의 것을 탐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도는 도리어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하여 얻은 수입의 일부를 구별하며 헌금하면 교회는 교회 안과 밖의 어려운 이웃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 어려운 이웃의 손과 발이 되어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된 말, 선한 말, 선한 일의 원뿌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기에 그리스도인은 참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선한 말과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32). 그래서 주의 몸 된 교회를 건강히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211205 주일낮예배 / 빌2:1-8)

사람의 건강상태를 말한다면, 육체의 상태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가시적 교회라고 불러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시적 교회의 건강함은 외적인 교회의 규모나 시설만 보고 결정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건강함의 정도는,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고 예배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성도는 어떠한 마음을 갖기를 힘써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 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절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을 기준으로 한 마음을 품어야 할까요? 빌립보서 1장 27절은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의 신앙 안에서 한 마음을 품고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가 함께 한 마음을 품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둘째, 그래서 성도는 한 마음을 갖기 위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오직 겸손하여 실제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서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겸손한 마음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여서 건강한 교회로 만들어 줍니다. 

셋째, 이타적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절은 말씀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이타적인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지체를 돕고 섬길 수 있도록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고전12:25). 이렇게 서로를 돌봐 섬길 때, 사역자는 물론 온 교회는 행복해 집니다. 

결국 한 마음, 겸손한 마음, 그리고 이타적인 마음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늘 한 마음, 한 뜻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겸손히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약한 자, 병든 자, 죄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마음을 가진 예수님 닮은 일꾼 되길 바랍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211128 주일낮예배 / 요3:22-30)

종교개혁의 5가지 원리 중에 마지막 원리가 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고,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죄인이 구원받은 이유이고,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예수께로 간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선생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드는 것에 경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으니라”(요3:27) 세례요한의 말에 어떠한 질투심과 시기심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열등감이나 좌절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면, 욥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여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만이 주인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요3:28) 더 나아가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신부는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즉,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신부를 취하는 신랑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성경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요, 교회의 유일한 신랑이라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식장에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신랑과 신부입니다. 들러리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주인은 오직 그리스도시고, 주님만이 교회의 신랑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주권과 주인되심만 인정한 것을 넘어서, 아예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자신은 더 작아지고 사라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며 그 뜻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사실, 이러한 자기 부인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신 자기 부인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쇠하여지길 바랍시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영광받기를 바랍시다.

좋은 선물은 다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211121 주일낮예배 / 약1:12-18)

한 짐승이 땅에 떨어진 상수리나무 열매를 먹은 후에, 계속 땅을 팠다고 합니다. 그 열매가 땅에서 생겨난 것인 줄 알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강대상 앞에 여러 종류의 과일을 올려놓았습니다. 이 과일을 보통 땅의 소산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과일은 하늘의 소산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 해와 비가 없었다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해와 구름, 그리고 하늘과 땅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데, 빛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빛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시139:13), 잠(시127:2), 쉼(마6:11)도 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재능과 기술도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신8:18).  

그런데, 선물 중의 선물은 무엇보다도 죄인이 받은 구원의 선물입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중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육체의 생명도 스스로 가질 수 없듯이, 구원받은 영생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의 추수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밭에서 복음의 낫으로 거두어서 교회로 모은 하나님의 열매가 바로 성도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열매인 성도의 삶이 곧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마치,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밭의 주인의 소유가 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맺게 하신 열매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열매가 더디 열리거나 늦게 열릴 때 성도는 기도하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날마다 감사와 기도로 하나님을 높이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211114 주일낮예배 / 히 10:37-11:10)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해도, 우리의 신앙은 언제든지 뒤로 후퇴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여전히 죄가 있고, 악한 영의 미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가 늘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성도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38절은 말씀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16)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 분의 약속의 말씀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 말씀합니다(요일5:10).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또한 좋은 열매들을 맺게 합니다. 먼저는 참된 믿음의 예배의 열매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여 순교한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예배하여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았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하늘로 올리어질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셋째로, 믿음은 참된 순종을 낳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짓고,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해도 떠난 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